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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립도서관 사서 이하나
쓸모 있는 것만이 환영받는 시대에 열과 성을 다해 쓸모없고자 하는 책이 있다(역자의 말). 영국 작가 마크 포사이스의 책 『사어사전』이다. ‘사어(死語)’란 일상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단어를 뜻한다. 말 그대로 죽어버린 단어다. 저자는 죽어버린 단어들을 무덤에서 끌어내 단어들이 살던 시대의 공기와 유머를 불어넣었다.
‘사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우리가 아는 사전과는 그 모양새가 사뭇 다르다. 일반적인 사전은 알파벳 순서대로 단어를 나열하는데, 『사어사전』은 하루의 시간 흐름 속에 단어를 배치했다. 새벽 6시 ‘동트기 전 깨어나 심란해하며 누워 있는 상태’에서 출발해 ‘악몽을 막기 위해 밤염불을 외우는’ 자정에 이르기까지 단어들은 하루라는 시간 속을 유영한다. 혹시 단어와 뜻풀이가 빼곡하게 이어지는 형태의 사전을 상상했다면 안심하길 바란다. 저자는 특유의 위트와 인문학적 통찰을 버무려 이 책을 한 편의 유쾌한 인문 에세이로 만들었다. 우리는 벽돌 같은 사전 한 권을 읽는 대신 가볍게 교양서의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어들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포사이스는 언어 고고학자로서 빅토리아 시대 농부들, 세계대전의 영국 해병들, 앤 여왕 시대의 노상강도들 사이를 오가던 단어들을 발굴해 말투와 사고방식을 복원했다. 그러나 언어가 변해도 인간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나의 예로 책 속에 등장하는 ‘더피피(duffifie)’라는 단어가 있다. 남은 몇 방울까지도 아껴 쓰기 위해 병을 옆으로 뉘어 두는 것을 뜻한다. 세제나 소스가 거의 바닥났을 때 병을 기울여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내는 우리의 모습이 곧 ‘더피피’이다. 애버딘 샤이어 지방 옛말에 현재 우리의 삶이 닿아있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은가? 시대와 지역이 달라도 낯선 단어 속에 인간의 근원과 본성이 이어지는 듯하다.
사라진 영어 단어가 정확함과 생동감을 주는 데에는 번역을 맡은 김태권 작가의 역할이 크다. ‘끼우뚱’, ‘발록구니’, ‘개름뱅이’ 같이 생경한 우리말을 골라, 잊힌 영어 단어의 질감을 되살렸다.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아늑하게 누워 있다는 뜻의 이불도롱이(grufeling), 철지난 뉴스로 지루하게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고리탑탑(bind) 등의 번역은 원문의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정서로 영어에 깃든 뉘앙스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결국 『사어사전』은 죽은 단어의 무덤이 아니라 단어가 부활하는 온실에 가깝다.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과거의 유머, 슬픔, 사소한 일상의 결을 발견하며, 동시에 현재의 언어와 삶을 다시금 음미하게 된다. 언어와 문화,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언어와 삶에 대한 시선이 한층 풍부해질 것이다. 저자와 역자의 말처럼 이 책의 유일한 쓸모인 지식의 즐거움을 마음껏 맛보시길 바란다.
저자 소개 (저자: 마크 포사이스)
작가, 언론인이자 편집인이다. 1977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언어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방대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수다쟁이’가 이번에는 술병을 쥐고 비틀비틀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술 취한 원숭이’에서 출발한 인류가 역사 내내 얼마나 줄기차게 술을 마셔왔는지를 속속들이 살펴본다. 선사시대와 고대 수메르, 고대 이집트와 중국을 거쳐 중세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 서부의 살룬에 이르기까지, 어떤 시대에서도 어떤 대륙에서도 술에 대한 인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으니! 애주가는 물론, 시시콜콜하고 알딸딸한 읽을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한 근사한 안줏감이 가득하다. 『콜린스 영어사전』의 편집자로 서문을 썼으며, 사람을 홀려온 위대한 문장들의 비밀을 본격적으로 파헤친 『문장의 맛』,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린 단어들을 추적하는 『사어 사전』과 『크리스마스는 왜?』,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등을 썼다.
목차
프롤로그_사전 답사
1장 오전 6시-새벽녘
2장 오전 7시-일어나 씻는다
3장 오전 8시-옷 입고 아침 먹고
4장 오전9시-출근한다
5장 오전 10시-오전 회의
6장 오전 11시-휴식
7장 정오-일하는 시늉
8장 오후 1시-점심
9장 오후 2시-일터로 돌아오다
10장 오후 3시-다른 사람을 일 시키려고 애쓴다
11장 오후 4시-차
12장 오후 5시-조금이나마 진짜 일을 해보자
13장 오후 6시-일을 마치고
14장 오후 7시-쇼핑한다
15장 오후 8시-저녁 식사
16장 오후 9시-음주
17장 오후 10시-구애
18장 오후 11시-비틀거리며 집으로
19장 자정-노스토스
에필로그_ 폐관 시간
역자 후기_ 옮긴이의 쓸모 없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