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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 저자 : 정창권 지음
  • 출판사 : 돌베개
  • 발행연도 : 2020년
  • 페이지수 : p
  • 청구기호 : 999.82-ㅈ494ㅊ
  • ISBN : 9788971990001

광진구립도서관 사서 최혜미

 

이 편지도, 앞으로 쓸 글들도 네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아. 그러나 상관없이 써볼 생각이야.

결국 혼잣말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지. 이 편지는 온전히 너를 항한 것,

우리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자 너에게 말을 거는 나의 방식이니까. 듣지도 답하지도 않을 너에게.’

- 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2021)*> 17p.

 

이것은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가 50년을 함께 해 온 이브 생 로랑의 죽음 이후 써 내려간 편지의 일부분이다. ‘죽은 이에게 부치는 편지라는 점에서 이 글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이 편지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다. 그것은 책의 뒤표지에도 적혀 있는데(편집자도 이 편지들을 읽으며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것. 네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이로써 편지는 하나의 증명이 된다. 당신(이브 생 로랑)이 살아온 삶과 당신(이브 생 로랑을 위해 살아간 피에르 베르베)이 살아온 삶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삶에 대한. 이것은 편지이자, 기록이며, 하나의 유산이다(시대의 산물이라 명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끝에서 시작한 편지는, 그 편지를 읽는 이들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펼쳐짐으로써 확장되는 것, 읽히는 것. 그것이 편지가 지니는 의의이자 매력이라, 나는 생각한다.

 

한 통의 편지는 한 장, 그 이상을 의미하고,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물론, 역도 성립한다). 한 통의 편지에 다 하지 못한 말을 차곡히 담아 보기도 하고, 전하지 못할 마음을 깊게 눌러 담아 보내기도 한다. 안부를 묻고, 안녕을 묻고. 기쁨을 전하고, 슬픔을 전하고. 원하기도, 구하기도 하는. 때때로, 생각한다. 편지는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 내가 가지는 또 하나의 정체성. 글쓰기이지만, 글쓰기이면서, 글쓰기가 아닐 수도 있는. 어떤 것일 수도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 경계의 방식 또한 내가 편지를 사랑하는 이유.

 

서론이 길었다. 그렇지만 왜 이 책이어야 했는지를 말하기 전에,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를 택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편지라는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딱 그만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담고 있는 무궁한 가치를 말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다. 실존하는 사료와 전문가의 연구를 통해서라면, 더욱 설득력 있지 않을까?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는 모두 85통이다. 이 편지들은 추사를 비롯하여 선대와 후대 등 5대의 가족이 주고받은

한글 편지라는 점에서, 18~19세기 가족의 생활과 문화, 언어, 의식 등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중략) 특히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에는 당시 여성의 역할과 의식뿐 아니라

남성의 집안일 참여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중략) 집안일은 여성이 주관하고,

남성은 바깥일에 전념할 뿐 집안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는 기존의 생각이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를 보면 여지없이 깨진다. 당시 남성이 집안일에 얼마나 많이 신경을 쓰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가부장제는 표면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아니 어쩌면 허울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6p.

 

추사는 어떤 사람인가? 추사 김정희.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藝苑: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 학문적으로 여러 방면에 두루 능통한 지식인.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은 예술가.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 모두 추사다.

 

그리고, ‘저번 가는 길에 보낸 편지는 보아 계시옵니까? 그 사이에 인편이 있었으나 편지를 못 보오니 부끄러워 답장을 아니하여 계시옵니까? 나는 마음이 매우 섭섭하옵니다.하고, 어리광을 부리듯 아내에 대한 애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 또한 추사다. 두 살 아래의 연하 아내에게 부 상장’(夫上狀: 남편이 올립니다)이라 쓰고, 꼬박꼬박 ‘~하옵니다’, ‘~하옵소서라고 존칭어를 쓰는, 이 또한 추사다. 집안의 장손으로서 자기 가족 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세세히 돌봤던 이 또한 추사며, 아내가 오랫동안 편지를 보내지 않자 토라져서 거의 형식적인 어투로 말하는 이 또한 추사다(저자는 이것이 젊은 시절 추사의 솔직한 모습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조선 후기는 완고한 가부장제 사회로 집안일은 오로지 여성의 몫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그러한 가부장제 의식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큰 오해이고, 왜곡일 수 있다.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를 보면, 당시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많은 집안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출가한 딸들이 친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은 집안의 대표자이지, 가부장적인 권력의 향유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추사 집안의 남성들은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또 깊이 이해했다. ‘이것이 과연 추사 집안만의 특징일까?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 85(추사가 쓴 편지는 40)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많은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된다. 과거의 한순간으로부터 현대의 이 시간으로 이어지는 어떤 연결성.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이어짐. 그 매개체가 되는 편지. 궁금하지 않은가? 펼쳐보고 싶지 않은가? 책은 우리에게 허용되는 특권이다. 우리는 수신자가 아님에도, 수신자를 위해 존재하는 이 글을 읽어 볼 수 있으니까. 이 안에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삶이 있고, 사랑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읽기라는 행위 하나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펼쳐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당신 앞에, 시대를 초월하여 당도한 이 편지를 말이다.

 

덧붙이는 이야기. 한글 편지는 소리글자에다 홀림체와 이어쓰기가 많아 오히려 한문 편지보다 판독이 더 어렵다고 한다. ‘여전히 현대어로 번역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책이 널리 읽히어 우리의 한글 편지에 대한 인식과 관심도 높아지길 바란다. 더 많은 편지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날이 도래하길.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Franz(프란츠) / 2021

- 이미 베스트셀러여서 추천 도서로 선정할 수 없었지만, 꼭 소개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책을 함께 적어본다.

저자 소개 (저자: 정창권)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 서울시청, 문화체육관광부 평가 및 자문위원. 서울시교육청 고전인문아카데미(‘고인돌’),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길 위의 인문학 등의 강의를 진행했다. 2010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2019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2019년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2015~2018년 고려대학교 석탑강의상 등을 수상했다. 주로 역사 속의 소외 계층인 여성, 장애인, 하층민 관련 인문서와 어린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요즘엔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인간 세계를 파헤치는 깊이의 인문학을 시도하고 있다.


목차

서문 한글 편지로 보는 추사 집안의 5대 가족사 이야기

 

시작하며 특별하지만 평범한, 그리고 아름다운 집안

 

1부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

증조모 화순옹주가 혜경궁 홍씨에게 받은 편지

조모 해평윤씨의 편지

외조모 한산이씨의 편지

어머니 기계유씨의 편지

아버지 김노경의 편지

막내 동생 김상희의 편지

증손자 김관제의 편지

 

2부 추사의 한글 편지

아내 예안이씨에게 보낸 편지

며느리 풍천임씨에게 보낸 편지

 

마치며 허울뿐인 조선의 가부장제

 

추사 집안 가족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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