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광진구립도서관 사서 김희선
한글을 뗐을 무렵부터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대학입시를 위한 지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커다란 목표 하에서 자잘한 시험들을 통과해가며 한 차례 치르고 나면 인생의 방향에 따라 다를 뿐 또 다른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또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머리를 쥐어싸매고 어떻게든 암기하려 몸부림치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싶다.
조선과 시험을 묶어보면 그저 그 시절 어른들의 바른 자세, 어떻게 공부했는지, 몇 번을 읽고 반복했는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정도가 연결되면서 떠오른다. 누가 경복궁이 사교육 1번지이고, 조카 답안지 훔치는 행위 등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심지어 입주 과외에 입시 정보를 꿰겠다고 고급 정보를 탐색하는 그 시절 조선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 조선판 <스카이 캐슬>이 따로 없다.
깡패인지 학생인지 모를 인간들의 행패는 충격적이고 출세에 대한 욕망을 포장한 율곡 이이나 100일 된 아기한테 과거급제하라는 정약용, 임금이 된 가방끈 짧은 개똥이 등 위인전으로나 읽었던 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저자는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통해 그 열기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고하게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선비 대신 요약본을 손에 쥔 양반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과외와 부모의 자식 체벌도 만연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입시 비리를 저지르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학자들도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과 너무 닮았다. 청소년 대부분이 대입에 자신을 갈아 넣는다. 그 과정에서 하는 공부는 오로지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로, 실속이 없다. 마음의 양식이 되지도 못할뿐더러 실용적이지도 않다.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바는 있지만 입시라는 목적하에 현장에서는 무시되기 일쑤다. 모두가 그렇게 쓸모도 없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대입 결과는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고위층 자녀들은 특혜를 안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저자는 과거 제도가 무너짐에 따라 조선 사회도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과거야말로 조선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제도였으니 말이다. 개인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세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역사를 교훈 삼아 지금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
♣ 저자 소개 (저자: 이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한·중·일의 역사를 계속해서 파고들며,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뒤지고 있다.
늘 읽고 쓰는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선조들의 공부에 관심이 미쳤다. 고상하게 인간 세상의 도리와 천지 만물의 이치를 논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잠시, 사료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여러 양반 가문의 문집까지, 조선 시대에 작성된 사료들에는 입신양명의 욕망과 입시 전쟁에 관한 구절이 빠지지 않는다. 당대의 선비라 하면, 오늘날의 입시생, 고시생 못지않게 엄청난 양의 교과서와 수험서, 참고서를 읽고 외웠다. 사교육 시장은 언제나 활황이었고, 시험장 안은 부정행위 때문에, 시험장 밖은 낙방생들 때문에 시끌벅적했다. 한편 권력형 입시 비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 어찌 500년 전의 일로만 볼 수 있을까.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입시 전쟁의 전형과 같았다.
그런즉 자식 공부에 골머리를 앓는 학부모라면, 공부하느라 진이 빠진 학생이라면, 교육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앞서 수난당했던 선배들의 이야기에서 묘한 동질감과 위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지금까지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조선사 쩐의 전쟁》 《역병이 창궐하다》 《요리하는 조선남자》 《은하환담》(공저) 《조선왕조실톡》(해설) 등을 썼다. 언젠가는 소설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그때까지 고양이들, 또 가족과 함께 평온한 하루하루를 쌓아가려 한다.
♣ 목차
머리말│잃어버린 왕도를 찾아서
1장 어째서,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을까
01 정약용, 입시에 미치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위선│입시형 인간의 탄생│수천 권의 책과 수만 번의 독서│“뜻하고 종사한 것이 영달에만 있어서”│과거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
02 일곱 개의 관문과 어사화
생각보다 엘리트였던 생원과 진사│입신양명의 진정한 시작점, 성균관│문과 급제라는 최종 목표
03 지식과 지혜를 모두 담은 학습서
조선판 국정교과서: 《천자문》 《유합》 《훈몽자회》│삶의 지혜를 배우다: 《동몽선습》 《격몽요결》│과거 공부의 첫 단계: 《소학》 《대학》 《통감》
04 과거 공부의 삼박자: 읽기, 외우기, 쓰기
“1000번이나 읽으셨습니다”│세종을 뛰어넘은 다독가│통째로 외우거나 한눈에 외우거나│글씨가 예뻐야 팔자가 핀다│내용이 중요하지 글씨가 중요하냐│쓰기의 끝판왕, 승지
2장 조선 교육의 윗물과 아랫물
01 조선의 사교육 1번지, 경복궁
세자의, 세자에 의한, 세자를 위한│임금으로 향하는 외길│기록으로 남은 임금들의 성적표│임금이 된 개똥이│공부도 최고, 인성도 최고│그 선생에 그 제자
02 무엇이 양녕과 충녕의 운명을 갈랐을까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개입형 교육 대 방목형 교육│비교가 낳은 비극│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심보
03 입시의 한양 집중 현상
책은 없고, 갈 길은 멀고│과거 공부의 끝, 파산│노골적인 지방 차별│정조의 탄식│“선비와 서민의 구별이 어찌 있겠는가”
3장 가정교육과 자식 농사
01 무서운 엄마들
잔소리라는 지대한 관심│피가 마르지 않는 종아리│조선을 떨게 한 악모
02 더 무서운 아빠들
나만큼? 나보다!│알묘 잔혹사│아들과 손자를 학대한 이문건│영조의 콤플렉스│“억울해서 죽고 싶소”
03 과거는 선비의 길이 아니라지만
과거라는 욕망의 구렁텅이│제자의 경우와 아들의 경우│조선의 경우와 중국의 경우
04 체벌, 그 지도편달의 명과 암
아프지 않은 매는 없다│맞아 죽다│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이항복의 짐승 같은 삶│사위와 장인이 나라를 구하다│“이것은 귀신의 경지다”
4장 백년지대계의 붕괴 과정
01 명문가에서 유행한 입주 과외
“옛날의 교육에는 가에 숙을 둔다”│숙사들의 좌충우돌 생존기│천재를 알아본 천재
02 천민 선생과 양반 학생
천 냥 만 냥이 안 아까운 입시 정보│교과서의 위상을 뛰어넘은 참고서, 초집│고관들이 한밤중에 주자소를 드나든 까닭│썩은 나무를 깎아 옥을 만들다│누구라도 잘 가르치면 장땡!
03 입시는 어떻게 문란해지는가
“생원이 또 과거 보러 왔다”│정황만 있고 물증은 없다│팀 프로젝트이자 오픈 북 시험│행정 실수에 피눈물을 흘리다│후안무치의 끝, 답안지 훔치기│인간애 상실의 현장│성균관 담벼락과 대나무 관
04 나라를 무너뜨리는 권력형 입시 비리
까막눈의 장원급제자│내 당파 밀어주기가 불러온 과옥│위로는 정승부터 아래로는 병졸까지│집안이 장원을 뽑는다│“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은 과거”
5장 입시 전쟁의 승자와 패자
01 천재는 태어날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늘만 사는 사람, 남이│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진짜 천재 이이의 등장│거인의 그림자에 가린 사람들│악습이 된 면신례│천재의 삶은 전쟁 같다
02 어려서는 천재, 자라서는 범인
학원 선생이 된 고시 낭인│어린 천재의 죽음
03 길이 없은즉, 뚫어낸 여성들
내조의 의미│“훌륭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책을 쓰다
6장 각자도생이 시작되다
01 개천의 용은 승천을 꿈꾸는가
실력보다 중요했던 신분│간신보다 서얼이 더 싫다│개천에서도 하늘에서도 외로운 존재
02 그 많은 낙방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날고자 해도 깃이 잘린 것과 같으니”│장수생이라는 기나긴 터널│현실도피에는 금강산이 최고│무과가 쉽다는 착각│위로와 격려를 구하다│입시생인가 깡패인가│주변 사람들의 반응
03 장원급제자의 최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진실│머리보다는 혈연과 지연│최고의 동기부여, 결핍│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