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구립도서관 사서 박 주 용
한낮의 여름을 견뎌내고, 더 이상 햇빛이 옥죄지 않는 밤에는 가끔 산책을 빙자한 놀음을 하곤 한다. 그날의 기분에 걸맞은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에어팟을 귀에 꽂으면 하루의 마무리가 시작된다. 그리고는 생각의 늪에 빠진다. 오늘 나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부끄러운 후회를, 가까운 하천까지 걸으며 내일은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두서없이 꺼내둔다.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도 이러한 양상을 띤다. 주인공은 하릴없이 걷는다. 부산역 앞의 토요코인호텔, 부산미문화원이었던 부산근대역사관 등 부산 중앙동의 풍경을 담으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와 풍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하루의 반복 같지만, 매 순간 다른 형태와 먹거리, 사람과 시점이 교차한다.
이 책은 2009년 <을>로 데뷔한 박솔뫼 작가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이다.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된 소설을 갈무리해 독자 앞에 내놓았다. ‘미래’, ‘산책’, ‘연습’의 접점이 전혀 없는 세 단어가 자칫 소설의 분위기를 가볍게 느껴지게 할 수 있으나, 책은 생각보다 무거운 사건들을 다룬다. 80년 5.18민주화운동과 82년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이 책의 주요한 소재다. 가벼운 산책에서 사건의 물꼬가 튼다는 점에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다소 어려운 문체와 시간적 흐름이 일정치 않게 서술되어 소설의 서사를 중요시하는 독자들에겐 책의 시작이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되는 후반부에서 주인공들의 시점이 교묘하게 연결되는 순간, 모든 실마리가 풀리고 작가의 서술방식에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80년 6월은 80년 4월과 같은 곳인가 가망 없고 백치 같은 생각을 하고 사람들은 시체를 찾으러 다니고 조사를 받고 끌려가고 빈 옆자리를 보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을 찾아다니고…(후략) (p.192-193)
바래진 기억은 왜곡되고,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방화를 이유로 처벌받은 자들은 있으나, 이 방화를 저지르게 된 빌미를 제공한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80년 5월 광주는 ‘꼭 와야 할 미래’의 산책 연습이었고,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수없이 행할 수 있는 반복의 형태로 미래를 맞이한다. 과거를 발판 삼아 미래를 이룩할, 끊임없이 지속되는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가진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 저자 소개 (저자: 박솔뫼)
2009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여러 편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우리의 사람들』,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인터내셔널의 밤』 『고요함 동물』이 있다.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 목차
먼 곳의 친구들에게 _007
코코아 _019
개와 사랑 _041
새로운 것이 시작될 거야 _063
도넛 _083
다음에 쓸 것들 _105
부산의 눈 _127
따뜻한 물 _141
목욕탕 계획 _159
열아홉 시간을 달린 열차 _191
타워에서 _205
개는 연기를 잘한다 _227
작가의 말 _242
추천의 말 | 사이토 마리코(번역가·시인) _244